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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선생 행적 등록일 23-02-10 15:41 작성자 최고관리자 (118.♡.14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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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삼 문 (成三門) 1418~1456


호 : 매죽헌 (梅竹軒) , 시호 충문(忠文)
사육신(死六臣) :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 유응부
 

선생은 충남 홍성군 홍성읍 흥북면 노은동 외가(外家)에서 태어 나셨는데 태어날 때 “낳았느냐”고 묻는 소리가 세번 들려왔다고 해서 이름을 “三門”이라 지었다 한다. 조부(祖父)는 공조판서 좌찬성이셨고 부(父)는 도총관을 역임 하셨다. 公은 21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30세에 문과중시(重試) 장원에 뽑혔다.
또한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받으셨고 집현전 직제학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 대문언독”을 위시하여 많은 서적편찬을 하였으며 특히 “훈민정음” 창제의 업적을 이루셨다.


선생은 정음청(正音聽)소속 집현전 8유(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이개, 이선노, 강희안)와 함께 한글창제에 참여 자모(28字)인 훈민정음을 만들어 세종25년(1443)에 반포하게 되었다.
특히 선생은 음운체계를 알기 위하여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요동(중국)에서 13회나 만났으니 한글창제에 들인 공과 열정을 알만하다.
훈민정음 반포후 “동국정운”을 완성 한글로 주운(註韻)하셨고 1455년에 “홍무정운”을 역훈하고 “역대병요” “동인문보(미출간)”을 편찬 하셨다.
이와같이 한글창제에 집현전학사(초기 10名, 후기 20名)들 중 중추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다.

 
선생은 상왕(6대 단종)복위를 위하여 기회를 보던중 세조2년(1456) 명나라 사신 윤봉 일행을 창덕궁 광연전에서 향응을 베풀기로 할제 시회(詩會)라는 명목으로 六臣외 여러 동지들이 성삼문집에 모두모여 단종복위를 위한 거사 계획을 세워(운검자 : 성승, 유응부)실행하려 했으나 모의에 가담했던 변절한 김질의 고발로 六臣외 연루된 박쟁, 권자신, 김문기, 송석동, 윤영손, 이휘등 삼족을 멸하고 적몰 당하는 처형이 이루어졌다.


선생과 선생의 부(성승), 이개,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등은 사지(四肢)가 찢기는(여섯토막) 참형을 받았으며 (성승포함 성씨12명처형) 유성원은 집에서 자결하였다. 김시습(생육신)은 밤새에 시체의 일부(수급)를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성씨(姓)만 표시 5위(位)를 안장 하였다.


선생은 39세의 나이로 참형을 받았지만 역사상 가장 의(義)로운 충신이자 절개를 지킨 의기(義氣)의 화신(化身)으로 그가 보여준 임금을 섬기는 충(忠)은 우리역사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不事二君)
세조 또한 “당세지 난신 후세지 충신” 이라는 하교를 내린 특별한 의의가 있다.
역적의 집안으로 내려오다 235년이 지난(숙종17년 1691)에 성삼문등 사육신의 작위를 회복시키고 사육신의묘를 치제 하라는 명을 내렸다. 또한 숙종이 민절(愍節)이라는 사당의 편액을 하사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려 제(祭)를 지내게 하였다.

 
선생은 영조34년(1758)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 시호를 받았다.
춘강 남효온(사육신을 명명한 생육신의 한분)은 평하여 살아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고 죽음으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신하의 절의를 세웠도다 그 충분은 백일을 관통하고 의기는 가을서리보다 매섭도다 천금을 터럭같이 여기고 인(仁)을 이루고 의(義)를 취하니 은(殷)나라에 삼충(三忠)이 있고 동방에 육충(六忠)이 있도다 하였다.


公의 참형전 아래와 같은 시가 있으니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상상봉에 낙낙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 할제 독야청청 하리라


북은 울려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서쪽 하늘로 해는 기우느니
황천에는 주막이 없다던데
오늘밤은 어느집에서 묵어 쉬리오.


이 시(詩)는 매죽헌 성삼문 선생이 형장(刑場)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당할 때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쓴 시상(詩想)이다. 참형(斬刑)의 현장에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유 있는 마음과 위대한 인간상을 느낄수 있다.
순절후 선생의 신주(神主)를 숙부인 연안김씨가 손수제작 몰래 제사 지내오나 외손 박호가 외손봉사로 3대를 이어오고 공주로 피난시 인왕산에 매안한 것으로 추정. 80여년후 (1672)인왕산에서 우연히 발견 다음해 송시열 주도로 5월18일 홍주성선생 탄생 구택에 모신후 1676년 노은사를 창건 배향(다시외손봉사)하다 1903년 달전사(현재문절사)가 창건되어 배향 성문에서 향사하고 있다.


선생의 묘는 논산에도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한여름 시신의 일부(一肢)를 지고가다 힘들어 불평을 하자 어디에선가 “아무곳에나 묻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와 근처에 묻고 내려왔다 (현재 성삼문재라 칭함).
후에 김한이란 분이 성삼문재를 넘다 쉬는중 잠이들어 꿈에 “지금 내가 있는곳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르겠구나” 하는 소리가 들려 스님에게 물어보니 이근처에 성삼문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라 하여 묘를 찾아 시신을 수습하여 묘를 쓰니 이곳이 논산에 있는 “일지총”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