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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묘갈문

우계 성혼(成渾)선생 묘소. 묘비. 사당. 배향된곳 등록일 23-02-10 14:41 작성자 최고관리자 (118.♡.14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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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12世) 성혼(牛溪. 成渾 : 1535~1598) 선생은 16세기 조선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시다 선생은 청송(휘.수침)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고 17살 때 백인걸에게서 수학 하였으나 학문적 연원으로 보면 부친의 가학(家學)을 통해 조광조의 도학을 배워 고려말 이학(理學)과 조선조 도학(道學)을 계승하였다. 선생은 율곡이이(李珥)선생과 도의지교를 맺어 성리학(性理學)을 논하며 파주에 사시면서 도를 펴 나갔으니 후에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동국(東國) 18현(賢)의 한분이시다.


선생은 병조참지, 이조참의, 좌참찬(정2품), 대사헌을 역임 하셨고 사직을 청하면서 “남은 목숨이 죽음에 이르렀는데도 국가의 은혜를 갚지 못하니 한밤중에도 감분하여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방황하나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라고 우국충정을 토로하였다.


선생은 효성 또한 지극해 부친이 병이 들었을때 다리살을 베어 약에 넣어 생명을 연장 시켰으며 상을 당한뒤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와같이 효행과 언행 학문은 후손들에게 귀감을 주어 세상 사람들은 그를 도덕군자라고 칭송했다.


선생은 임진왜란시 “편의시무(便宜時務) 9조”를 올려 조세문제, 국방대책, 민생문제, 언로 문제등 당시 전란중의 국가적 급무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였다. 또한 개혁을 주창하여 그 대안으로 “혁폐도감”의 설치를 주장 공직자가 지니어야할 목민(牧民)윤리로 청렴, 신중, 근면 세가지를 제시하였고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야 한다고 하였다. 선생은 내면적 자기수양을 중시하고 도학문을 지녔고 실심(實心), 실천(實踐)을 중시하고 무실(務實)학풍을 열었으며 수양의 방식으로 경(敬)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우계학파의 특징은 성혼의 학문과 사상에 연원하는 것으로 한국 유학사에 성혼의 위상을 입증해 준다. 선생은 파산(坡山)서원, 죽림(竹林)서원, 황산(黃山)서원, 소현(紹賢)서원, 운전(雲田)서원, 문회(文會)서원 및 成門의 물계(勿溪)서원등에 배향되었고 인조7년(1629)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받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묘배향 되셨다.


문집으로 우계집(牛溪集,) 주문지결(走門旨訣), 위학지방도(僞學之方圖)및 수많은 유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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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성혼선생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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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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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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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우계사당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


▲죽림서원 (우계선생 배향된곳) :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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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위단비


우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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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묵